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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뷔] 흔한 18세 남고딩의 로맨스 데이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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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뷔] 흔한 18세 남고딩의 로맨스 데이 06

W. 국빛


도대체 나는 전생에 무슨 업을 그렇게 쌓았을까. 나라를 팔기라도 했나.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시련과 고통을 받을 수 있는 건가. 원래 인간에게는 각자 평생을 살아가면서 정해진 만큼만 행복하고 불행하다던데, 나의 신은 그렇게 두지 않으셨나 보다. 아마 남들보다 더한 고통과 번뇌의 늪에 빠지게 할 생각인가 보다. 지민은 그렇게 생각했다. 아마 정말 나는 전생에 큰 잘못을 한 게 틀림없다고. 버뮤다 삼각지대의 가장 중심에 앉게 된 것도 모자라서 아직까지도 찬바람이 쌩쌩 부는 정국과 태형 사이에서 지민은 딱 죽을 맛이었다. 정해진 만큼의 불행과, 그게 너무 괴롭지는 않아서 죽기 전까지만 힘들게 한다더니 그건 다 뻥이었어. 차라리 여기서 세상을 등지는 게 더 마음이 편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리고 이 순간에 드는 생각은 윤기가 제안했던 바로 그 방법. 제 앞에 앉은 태형의 등을 쿡쿡 찌르자 자다 일어난 태형이 날렵하게 빠진 턱을 벅벅 긁으며 일어났다.


"왜애.... 나 졸려."
"야, 너 여자 소개받을래?"
"엉? 이건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야. 뭐래."


하암. 졸린데 깨워서 개소리하고 있어. 다시 엎드리려는 태형을 한 번, 그리고 제 곁의 정국을 한 번. 정국이 지민을 곧 때려죽일 기세로 무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그 이상 말하면 널 이 세상에서 없애버리겠다고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저 얼굴을 보아하니 앞으로 한 3일은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설치겠구나. 진짜 민윤기 말을 믿어도 될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눈치를 보고 있는데 태형이 눈을 두어 번 비비더니 지민 쪽으로 몸을 돌린다. 그런 후에 지민의 책상 위로 반쯤 엎드려 팔에 턱을 대고 물끄러미 올려다보며 물었다.


"....예쁘냐?"


그 말에 정국의 눈썹이 또 꿈틀, 올라간다. 말은 안 하는데 오히려 말 안 하고 가만히 둘의 대화를 듣고만 있는 게 훨씬 무섭다. 차라리 불처럼 화를 내면 덜 무서울 것을 나중에 태형이 이 자리를 벗어나고 나면 그러자마자 정국이 지민을 상대로 헤드록을 걸어올 것 같다. 왠지 가뜩이나 좁은 내 자리가 더 좁아지고 그 옆에 새로운 금을 더 그어댈 것 같다. 하지만 안 된다. 여기서 굴하면 안 된다. 윤기는 그 이후에, 정국이 어떠한 반응을 보여도 끝까지 밀어붙이라고 했으니까!


"어, 어? 응. 당연히 예쁘지. 근데 내가.... 여자 사진은 없고, 아무튼 엄청 예뻐! ㅁ, 몸매도 잘빠지고! 성격도 좋아!"


거짓말이 술술 나온다. 씨이발. 사실 그런 완벽한 여자가 있으면 김태형에게 소개하는 게 아니라 내가 먼저 가져버렸지. 아주 그냥 내 우리 안에 가둬서 여왕처럼 떠받들고 살 거야. 지민의 주변에 그런 이가 어디 있겠는가. 그냥 생각나는 만큼 떠드는 거지. 사실 진짜 그런 사람이 있다면 지민이 먼저 열심히 작업을 걸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 속임수가 제대로 먹혔는지 태형은 꽤 흥미가 생긴 듯 지민에게 이것저것 묻고 있고, 지민은 되는 대로 말을 꾸며내면서 등 뒤로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는데 정국이 인상을 확 찡그린 채 책상에 다리를 올려놓는다. 아니, 정확하게는 책상을 내리찍었다고 해야 더 맞는 말일까?


쾅! 하는 소리와 함께 길쭉하게 뻗은 두 다리가 책상 위로 뻗어지고 정국이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었다. 인상은 저기 뒷골목 양아들에게 지지 않을 정도의 험악함을 보이면서 어디 더 이야기하려면 해 보아라, 하는 그런 태도로. 그런 모습을 태형이 흘끗 보더니 뭐야? 하면서 다시 지민에게 가상의 여자에 대한 것을 물었다. 그런 이야기들을 듣고 있던 정국이 입술을 질끈 문다. 그리고 '그 여자는 있지, ㄱ, 그러니까....'하던 지민의 말을 뚝 자르고 손으로 지민의 입을 텁 막아버린 후 태형에게 쏘아붙였다.


"씨발, 진짜."
"너 왜 그러냐? 손 치워 봐. 지민이랑 얘기 좀 하게."
"내가 너한테 존나 큰 잘못을 한 건 맞는데.... 너, 진짜 너무한다."
"뭐?"
"정말 너무한다."
"뭐라는 거야!"


정국이 벌떡 일어나 신경질을 내고서 교실 밖으로 나가버린다. 그러자 꿀 먹은 벙어리가 된 듯 지민이 입을 꾹 다물고 태형은 뒷모습을 보다가 그 모습이 다 사라지고 나서야 이마를 덮고 있던 앞머리를 쓸어넘겼다. 결 좋은 머리카락이 뒤로 넘어갔다가 다시 앞으로 돌아올 때야 태형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가 버럭 화를 냈다.


"잘못한 건 전정국인데 왜 내가 저런 말을 들어야 하지?"


나라도 화났겠다, 인마. 사실 윤기로부터 이 모든 것의 전후 사정을 다 들은 지민인지라 정국이 왜 저렇게 나가는 건지 다 알고 있다. 내가 전정국이었어도 화가 나고 괴로웠을 것이다. 아주 어렵게 좋아한다고, 상황이야 개떡 같았지만 어쨌거나 진짜 어렵게 좋아한다고 했더니 그런 사람 앞에서 다른 사람을 소개받겠다 하고 있으니 얼마나 속이 타고 짜증 났을까. 머릿속으로는 김태형이 다른 사람이랑 있는 걸 상상하면서 얼마큼 화를 내고 있었을까. 내가 아닌 다른 사람과 함께 한다는 생각을 했을 땐 그냥 다 없애버리고 싶었을 텐데. 전정국이라면 그러고도 남지.


"....이번엔 네가 잘못했다, 태형아."
"왜? 내가 뭘 잘못했어?"
"너 같으면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 네 앞에서 다른 사람 만난다고 하면 좋겠어?"
"네가 소개해 준다고 했잖아."
"아, 그거 다른 이유 때문이야. 소개 안 해 줘. 없던 일로."
"야!"


결국 태형의 간절함은 통하지 않았는지 지민은 소개해 주지 않겠다고 했다. 사실 없어서 못 해 주는 거지만. 정국은 수업시간이 다 됐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대로 땡땡이. 이제 짝이 된 지민이 그다음 시간의 선생님에게 정국이 아파서 보건실에 갔다고 해 주지 않았으면 아마 그대로 땡땡이 처리. 돌아오지 않는 정국에 조금 신경이 쓰이긴 했지만 그래도 이제는 딱히 걱정할 수 있는 위치도 아니고, 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태형이 아무리 만인에게 다 잘하는 사람이라지만 정말 한 번 아닌 건 영원히 아닌 구석도 있었으므로 그냥 땡땡이인가 보다, 하는 생각 정도만 했다.


정국이 돌아온 건 두 교시가 더 끝나고 난 이후였다. 그것도 사실 교실에 돌아온 게 아니라 다른 이의 목소리를 통해서 알게 됐지만. 어째 자꾸만 잠을 설치는 것 같아서 기분이 나빠진 태형이 이유를 찾고 있는데 역시 남학교라 그런가 유난히 싸움이 나면 더 시끄러웠다. 수컷들끼리 힘자랑하고 다니는 거 하루 이틀 일도 아닌데 왜 저렇게 호들갑인지, 평소에도 시끄럽기로 소문났던 녀석이 교실 앞문을 벌컥 열고 크게 소리쳤을 때야 엎드렸던 태형의 고개가 들렸다.


"야! 싸움 났다!"
"어디? 누가 싸움? 구경 고고!"
"화장실에서 김진태랑 전정국 싸운다!"


....뭐라고? 누구? 제 귀를 의심하고 태형의 상체가 점점 들렸을 때 지민 역시 놀란 듯 태형의 등을 쿡쿡 찌른다. 태형 역시 적잖게 동요한 듯 동공 지진이 일어나고 있는데 지민의 가 보자는 말에 얼른 일어나 헐레벌떡 문제의 화장실로 뛰었다. 어차피 화장실이 그리 멀지 않았으니까 금세 도착했는데, 이미 구경꾼들은 시장통만큼이나 북새통을 이루고 비구름만큼이나 많이 모인 사람들이 안의 상황을 전해 듣거나 직접 보고 있었다. 그 사이를 파고들자 다들 태형을 보면서 저들끼리 수군거리는 게 영 수상해서 더 서두르다 주변에 있던 녀석 한 명을 잡아서 태형이 물었다.


"야. 쟤들 왜 싸웠대?"
"어.... 나도 잘 몰라. 그런데 애들이 얘기하는 거 들어보면 너 때문이래."
"나? 왜?"
"김진태가.... 너를 두고 좀 안 좋은 말을 했나 봐. 나도 그것밖에 몰라."
"어, 그래. 고맙다."


아오, 저 병신 새끼. 누가 내 뒷담 좀 할 수 있는 거지. 고작 그런 걸로 사람을 쥐어 패고 있어! 안 그래도 정국이 가끔 다혈질처럼 나올 때가 있다는 건 알았지만 이럴 줄은 몰랐다. 이미 화장실 안에는 정국과 진태만 있을 뿐이고, 그마저도 진태는 멱살을 잡혀서 정국의 아래에 깔려 끄응, 앓는 소리만 내고 있었다. 김진태는 이미 입가가 다 터지고 얼굴이 부어 멍이 새파랗게 든 얼굴. 그에 못지않게 입가가 심하게 터진 정국의 얼굴을 보고서 태형이 얼른 그 몸을 붙잡았다. 팔 두 쪽이 전부 태형에게 잡혔어도 여전히 발길질해댄다.


"놔, 씨발! 놓으라고! 저 새끼 죽여 버릴 거야!"
"그만해, 미친놈아! 더 때리면 쟤 진짜 죽어!"
"죽으라고 해. 야, 너 다시 지껄여 봐. 아까 했던 말 다시 말해 봐!"
"왜.... 네가 그렇게 싸고도는 그 김태형 오니까 더 빡 치냐? 씨발, 김태형 좀 따먹겠다고 했다. 그 말 하나가 존나 열 받는 거 보면 진짜 너희 사귀냐? 더럽게."


얼굴은 이미 있는 만큼 다 쥐어 터진 주제에 말은 잘한다. 들리는 말에 태형의 인상도 그리 좋지는 않다. 뭘 따먹어? 저게 나를? 내가 무슨 과일도 아니고 따먹긴 뭘 따먹는다고 지랄인지. 생각으로는 이 야수 같은 전정국의 팔을 다시 놓아 주고 저걸 죽어라 팰 수 있게 하고 싶지만 지금도 충분히 일이 커진 상태에서 더 커지게 하면 정국은 틀림없는 정학이다. 상황에 따라서 쟤 부모님이 와 따지기라도 하면 최악의 경우 저렇게까지 곤죽이 되게 때려 놨으니 퇴학을 시켜라 말아라 하는 이야기가 나올 수 있으므로 태형이 애써 낑낑대며 정국을 화장실 밖으로 쫓아낸다. 그리고 화장실 출입문을 탁 닫아 잠궈버리고 진태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야. 나 과일 아니야. 따먹는다는 말은 과일 딸 때나 쓰는 말이라고. 한 번만 더 그런 더러운 말 지껄이면 내가 너 가만 안 둬."


평소에 말을 조금 횡설수설하거나 가끔 더듬는 버릇이 있던 태형이었는데 이럴 땐 더듬지도 않고 또박또박 잘도 했다. 표정 역시 약간 웃는 것 같은데도 잘 보면 서늘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더러운 화장실 바닥에 널브러진 몸을 보고 생긋 웃더니 몸을 일으킨다. 그리고 심호흡을 한 번 하더니 그대로 퍽! 진태의 아랫도리를 한 번 걷어차자 '아악!' 하는 화장실을 쩌렁쩌렁 울리는 비명소리가 들리고 해맑게 웃는 표정으로 화장실을 나오자 저만치에서 학생 주임이 커다란 몽둥이를 들고 빠르게 달려오고 있었다.


"어떤 새끼가 싸우냐!"


순식간에 모세의 기적이라도 일어난 듯 학생들이 양옆으로 갈라지고 그 사이로 학생 주임이 뛰어와서 진위를 파악하고 있었다. 화장실 바닥엔 아랫도리를 부여잡고 보글보글 게거품을 물고 있는 학생이 한 명, 그리고 주변에 얼굴 터진 다른 학생이 한 명. 거기에 노한 학생 주임이 몽둥이를 휘두르며 둘 다 학생부실로 따라오라며 으름장을 놓고 먼저 앞장서 걷는다. 씩씩거리는 모습에 태형이 곤란한 듯 쓴웃음을 짓다가 정국을 본다.


눈이 마주쳤다. 분명 시선이 닿았다. 그런데, 그런데.... 정국이 너무 차가운 눈으로 태형을 본다. 마치 모르는 사람인 양. 아니, 모르는 사람이라고 해도 그렇게 차가울 수는 없겠다 싶을 정도의 냉기가 그대로 서린 눈동자 속엔 아주 잠시 태형이 비치다가 곧 고개를 홱 돌려버린다. 학생 주임의 뒤를 따라가는 정국의 뒷모습 너머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가는 길마다 복도에 피가 떨어지는 게, 정국의 피인지 정국에게 얻어맞은 놈의 피인지 몰랐다. 손으로부터 떨어지는 핏방울을 보는데 태형이 인상을 쓴다. 시선 한 번 마주하지 않고 그냥 가 버리는 모습이, 저더러 정말 너무하다며 돌아섰으면서 또 남이 제 욕을 했다고 죽기 전까지 두들겨 팼다는 게.


....상당히 모순적이면서도 가슴 한구석이 아프다.


왜 그런 거야? 정말 내가 너무했다면,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면 그러지 않아도 됐을 텐데. 저놈이 내 욕을 하든 내 조상을 욕하든 그냥 내버려 둘 수도 있었을 텐데 왜 때렸어. 왜 때리고 나서 나한테는 그리 차가운 시선을 줘. 어렸을 때부터 정국을 알았지만, 생전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정국이 화내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한 건 아니지만 대부분 금방 풀리기도 했고 저렇게까지 얼음처럼 차갑게 자신을 대했던 적이 없었기 때문일까. 생각보다도 태형의 마음이 더.... 좋지 않다. 그리고 역시 건물의 맨 위층에 있는 게 3학년 교실. 그러므로 맨 아래층에 있는 교무실로 가던 윤기와 호석은 2학년 복도가 엄청 시끄러운 걸 보고 구경 왔다가 한 명은 놀라고, 한 명은 흐응. 하고 씩 웃는다. 아, 물론 웃은 쪽이 민윤기다.


"쟤네.... 2학년 또라이 아니냐?"
"어."
"유명한 만큼 또라이 짓도 야무지게 하는구나. 싸움박질도 대차게 하는구만."
"호석아. 너 먼저 교무실 가라. 나 저 또라이 알아."
"이런 씨! 야, 우리 교무실 가서 들고 올 거 많은데? 나 혼자 다 못 들어."
"금방 갈게."


씨.... 툴툴거리면서 알겠다며 먼저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호석을 배웅하고 태형에게 다가온 윤기가 묻는다. 야. 쟤네 왜 싸웠냐? 그러자 태형이 자세한 건 생략하고 그냥 쟤가 내 뒷담 까서 정국이가 때렸대요, 까지만 이야기하자 듣고서 피식 웃는다. 역시 전정국은 별 수 없구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가 태형에게 물었다.


"근데 전정국 나오고 너 들어갔을 때 소리 지르는 것 같던데. 그거 네가 지른 거냐? 안에서 무슨 일 있었어?"
"아니요. 그거 제가 때린 건데요?"
"어딜 어떻게 때렸길래 지옥에서부터 들릴 법한 소리가 들리냐...."
"아, 여기 때렸거든요. 여기."
"여기?"


태형이 빙긋 웃는다. 그리고 고개를 아래쪽으로 내려 하체를 바라본다. 남자에게 있어 가장 소중하고, 중요한 그곳. 종족 번식의 의무를 다하게 해 주는 급소. 거기에 시선이 머무르자 아.... 윤기가 모두 알았다는 듯 얼굴이 조금 파랗게 질렸다. 속으로 명복을 빈다. 김태형의 손이든 발이든, 아무튼 김태형으로 인해 죽었을 너놈의 수억 마리 정자들이여, 잘 가요.... 같은 남자로서 그 고통이 여기까지 전해지는 것 같구나. 쯧, 혀를 차고 있자 태형이 씁쓸하게 웃는다.


"....정국이가 더는 절 안 보려나 봐요."
"왜? 그건 또 무슨 말이야."
"걔랑 오랜 시간을 함께 지냈고 자라왔지만 처음 보는 얼굴을 하고서 날 보더라고요. 그리고.... 가 버렸어요."
"....어떻게 보면 화를 낼 건 걔가 아니라 너 아니냐? 왜 걔가 그런대."

이미 여자 이야기가 나왔다는 거 다 알면서, 그래서 정국이 삐쳐서 나가버렸다는 지민의 카톡을 받아 다 알면서 일부러 묻는다.

"글쎄요.... 근데 선배."
"어."
"이거.... 생각보다는 더 아픈 것 같아요."
"너도 맞았냐?"
"아니요. 그건 아니고 그냥...."


그냥, 마음이 조금 아픈 것 같아요. 사실 좀 많이. 정국이의 그런 얼굴을 처음 봐서, 차갑게 날 두고 갈 길을 가 버리는 정국이가 밉기도 하고 그 뒷모습이 슬프기도 하고.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전정국이 아까 교실에서 나갈 때부터 마음이 좋지 않았는데 정작 이제 날 외면하는 모습이 왜 이렇게 아픈 건지.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던 모습이라 더 그런 건가. 다른 사람은 다 그렇다 쳐도 정국만큼은 절대 자신에게 진심으로 화를 내지 않을 거라고, 언제까지고 같이 있어 줄 거라고 생각했다. 그게 너무 익숙해서.


언젠가부터 정국이 태형을 믿고 좋아라하고 늘 곁에 있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익숙하고 당연하다고, 항상 그래야 한다고. 그러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언제부터 당연하게 여기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해 줘서 고맙다거나 미안하다거나 하는 것보다는 그냥.... 익숙했는데. 익숙했던 게 사라져서 이렇게 마음이 아픈 걸까?


태형은 도통 알 수 없었다. 정국이 왜 저러는 건지, 왜 자신의 마음이 이렇게도 아픈 건지. 힘든 건지. 그 차가운 표정 하나에 왜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지. 그리고 그때 정국이 했던 말이 스쳐지나간다.


'가지 마. 너 이렇게 나한테서 등 돌리고 가 버리면 난 어떻게 해야 돼.'


....나야말로 어떻게 해야 하냐?


답은 돌아오지 않을 텐데 애써 허공에 대고 질문을 던졌다.


​[국뷔] 흔한 18세 남고딩의 로맨스 데이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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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뷔] 흔한 18세 남고딩의 로맨스 데이 05

W. 국빛


아, 지옥이 있다면 여기일까. 죽음의 어색함이 셋의 사이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차라리 지민이 그 자리에 없었더라면 아무것도 모르는 거니까 너희 왜 그러냐며 눈치 없게 묻기라도 하겠는데 그런 것도 아니고. 교실의 맨 뒷자리가 태형과 정국의 자리, 그 앞에 앉은 게 지민이었다. 그러나 바로 옆에 앉은 것이 아니라 더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건 그냥 기분 탓일까. 어쩐지 등으로 식은땀이 삐질삐질 흐르는 것 같다. 정작 태형이나 정국은 지민을 바라보고 있지 않은데 지민은 등에 따가운 시선이 박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면서 노트에 의미 없는 낙서를 하고 있다.


확실히 그때 이후로 둘은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보통 또래인 지민을 포함해서 총 셋이 잘 어울려 다녔는데 밥을 먹을 때도, 체육 시간에 나가서 공을 가지고 놀 때도 하교할 때도, 언제가 됐든 둘은 한마디도 나누지 않고 있었는 데다 항상 정국과 태형 사이에 지민이 서서 걷는 기이한 현상까지 생기고 있었다.


내가 무슨 벽이냐, 너희 싸웠다고 날 사이의 벽으로 쓰지 말라고! 심지어 둘 다 키가 크니까 사이에 우물 파이는 기분이라고!


....그렇게 소리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소리는커녕 요새 둘 사이에서 숨을 쉬는 것도 힘들 정도로 어색한 분위기가 감돈다. 아예 절교라도 하든지. 그것도 아니면서 나는 무슨 죄인가. 전생에 무슨 업을 그리 많이 쌓아 이런 어색한 분위기 늪에 빠져야 하는가. 전처럼 둘이 장난치다 날 끌어들여서 놀려도 좋으니 제발 이 어색함 좀 어떻게 해 줘.... 전에는 볼살이 나름 통통하던 지민이었는데 며칠 새 꽤 많이 수척해진 것 같다.


***


그 날 이후로 확실히 정국을 보기가 껄끄럽다. 여태까지 자신에게 스트레스를 주던 이가 가장 믿고 있던 친구인 정국이라는 것도 충격이었는데 갑자기 한다는 소리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거라니. 생각도 못 하고 있었던 말에 태형은 나름대로 꽤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그때가 지나가고 나서 여전히 자리는 붙어서 앉고 있지만 어쩐지 무어라 말을 하지 못하겠다. 그때 이후로 드는 건 '나도 얘를 좋아하고 있던 건 아닐까?'하는 생각이라거나 설렘이 아닌 충격, 그 자체. 그리고 왜인지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가슴 통증이었다.


어쩌다 저와 눈을 마주칠 때면 정국은 아무 말 없이 그저 시선을 바로 돌려버렸는데 꼭 지켜보고 있다가 피하는 것 같은 모습에 이상하게도 마음이 너무 아프다. 정국과 시선을 마주하면 늘 재미있고 기분 좋았는데 자꾸만 피해버리는 그 모습에 태형이 한숨을 쉰다. 도대체 우린 언제부터 잘못된 걸까. 넌 언제부터 그런 마음을 가지고 날 봤고, 볼 때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너.... 혼자 많이 아팠니?


아무래도 괴로웠겠지? 수업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리고 태형은 조금 전까지 가만히 앉아있다가 책을 약간 높게 쌓아 그 위로 얼굴을 대고 엎드렸다. 시선은 창문 쪽을 바라보고 있지만 생각은 온통 정국뿐이었다. 얼마나 괴로웠을지, 저 녀석도 일부러 그런 건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괘씸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걱정과 불신이 쌍벽을 이루고 있는 제 속을 보면서 기억을 더듬는다. 지금보다 조금 더 어렸을 때 앞집에 살던 누나를 짝사랑하던 제가 떠오른다.


제법 예쁘게 생긴 그 누나를 보면서 설레는 마음으로 만날 때마다 인사하고 태형이 삐뚤빼뚤한 글씨와 모자란 솜씨로 힘들게 연애편지를 써서 전해주려던 날 누나는 남자 친구가 생겼다며 수줍게 웃었다. 편지를 전해주기도 전에 태형에게 와 아는 척을 했던 누나는 좋아하는 사람이랑 사귀게 되었다고 좋아하기에 그 편지는 전해지지 못한 채 손아귀에서 형편없이 구겨지고 태형은 애써 웃으며 축하한다며 이야기했었다. 제법 순수했던 태형은 그것만 해도 한동안 끙끙 앓았는데 그때도 정국은 말없이 다독여 주었다. 그때에도 날 좋아하고 있었다면 대체 정국이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내가 다른 사람을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을 텐데 속으로 괴롭지는 않았을까? 만약 반대로 생각해서 내가 정국이를 좋아하는데 쟤가 다른 사람이랑 짝짜꿍하고 있으면 화도 나고 슬플 것 같단 말이지.


확실히 그런 일이 있고 나서 칠판에는 아무도 답을 적지 않는다. 질문은 매일 바뀌고 있었지만 더는 달리지 않는 답에 학교의 사람들은 금세 흥미를 잃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굴었다. 남학생들은 어제 만난 어느 여자에 관한 이야기나 게임을 어떻게 하면 더 잘할 수 있는지를 주제로 두고 열띤 토론을 했다. 그렇다는 걸 태형도 알고 있어서 픽 웃었다. 언제는 그렇게 칠판맨이라고 좋아하더니. 세상에, 그게 전정국일 줄은 누가 알았겠어. 점점 무거워지는 눈꺼풀이 결국 곱게 감겼다.


그러다 다시 눈이 마주친 건 수업을 받던 중이었다. 어차피 수업 시간의 태형은 자게 내버려두는 게 다른 학생을 위해 좋은 거라고, 깨우면 교실이 시끄러워지니 포기한 선생님들 덕분에(그래도 이렇게 자는데 불구하고 태형의 시험 성적은 꽤 잘 나왔으니 내버려두었다) 한참 잘 자다가 몸을 한 번 일으킨다. 그 모습에 '쟤가 왜 벌써 깼지?!' 하며 겁을 먹고 움찔하는 선생님을 아는지 모르는지 크게 하품을 하고 비몽사몽 한 채로 쓰읍, 침을 한 번 닦고 반대편으로 엎드린다. 정국의 쪽으로 고개를 두고 자는 것이다. 한 방향으로만 자서 목과 어깨가 결리는 듯 인상을 잠시 찡그리다가 다시 펴지는 미간이었다. 그러다 태형이 엎드려서도 여긴 어딘가, 나는 누군가 하며 부스스하게 무심코 옆을 바라보는데 정국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턱을 괴고서 고개는 앞을 향한 것 같은데 잘 보면 눈길은 태형을 향해 있었다. 그리고 이번엔 눈이 마주쳐도 피하지 않았다. 언제부터 저렇게 보고 있었던 건지 알 수 없었는데 피하는 것 대신 금방에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을 하는 게 또 태형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그러다 정국이 견디지 못하겠는지 시선을 피해버리자 그게 또 태형을 아프게 했다.


***


결국 지민이 폭발했다. 화해하든 절교를 하든 둘 중 하나는 하라며 둘을 두고 먼저 나가버렸다. 점심에 다른 친구와 밥을 먹겠다며 둘이 먹으라고 쌩하니 나가버려 태형은 눈치를 본다. 이대로 정국과 둘이 갈 수도 있겠지만 그랬다가는 체할지도 모른다. 그동안은 지민이 있으니까 그 핑계로라도 같이 먹고 놀았지만 오늘은 없으니 이걸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냥 매점에 가서 빵이나 사 먹을까 고민하는데 그런 태형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정국은 무심하게 주변에 있던 다른 사람을 불렀다.


"야, 인철아. 너 얘랑 같이 점심 좀 먹고 와."
"왜? 너랑 쟤랑 지민이랑 매일 같이 먹었잖아. 지민이는 어디로 갔어?"
"걔 오늘 다른 애들이랑 먹는대."
"그래? 그러지, 뭐. 근데 넌 안 먹어? 어디 아픔?"
"어. 아픔."


짧게 대꾸하는 정국의 모습에 놀란 눈을 하다가도 다시 기분이 꽁기하다. 뭐야, 이제는 자기가 날 피하겠다는 거야? 지금 화를 내야 할 건 난데, 피해도 내가 피해야 하는 건데 왜 지가 피하고 있어? 속 좁은 태형은 또 이런 걸로 툴툴거린다. 한편으로는 정국이 이제는 자신을 피한다는 거에 답답하기도, 서운하기도 했다. 정작 이기적이네 나쁜 놈이네 욕하고 돌아선 건 난데 왜 내가 이렇게 애타고 힘든 거냐고. 불공평하다. 정작 태형이 보기엔 정국은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고 본인만 힘든 것 같은데 어떻게 저리 태연할 수가 있는 건지.


그러나 우리 눈치 고자 태형만 모를 것이다. 정국이 사실 지금 힘들어 죽을 것 같은데 티 내지 않으려고 어떻게든 애쓰고 있다는 걸. 태형이 또 화라도 낼까 봐, 안 그래도 틀어진 사이가 더 틀어질까 봐 그게 무서워서 더 다가가고 싶은 것도 참고 있는 거라고. 김태형이 지금 전정국을 보기가 되게 껄끄러울 것 같으니 정국의 입장에서는 배려하면서도 사실 1분 1초, 실시간으로 마음이 찢어지고 있는 것 같은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는 걸 태형만 모를 것이다. 제삼자인 지민이 보기에도 정국이 요 며칠 부쩍 수척해진 데다 원래 태형만큼 말이 많던 사람은 아니지만 없던 말이 더 없어졌다는 걸 알고 있는데 태형만 모른다. 그가 보기에만 정국이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고, 어떻게 보면 정국보다도 본인만 생각하고 있는 건 태형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다.


결국 태형은 다른 사람이랑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정국은 아무것도 입에 대지 않은 듯했다. 그저 핸드폰만 보는데 뭘 그리 보는지 액정이 뚫어질 것 같다. 그게 거슬려서 태형이 물을 마시러 나가는 척하고 정국의 뒤로 지나간다. 그러면서 힐끔 내려다보는데 카카오톡. 그것도 태형과 나누었던 것들. 그냥 지나가느라 제대로 보지는 못했지만 분명 액정에는 평소에 태형이 즐겨 쓰는 스티커나 웃긴 이미지들이 잔뜩 떠 있고 정국은 그걸 천천히 내려보던 중이었다. 그래서 조금 묘한 기분으로 밖으로 나가자 정국이 핸드폰을 내려두고 의자에 등을 제대로 기대어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러자마자 깊은숨을 토해낸다.


아.... 진짜 괴롭다. 김태형 제대로 못 보고 있으니까 죽을 것 같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것도 힘든 일이구나. 김태형이 없는 내 하루는 너무나 길다. 아프고 괴롭다. 눈 한 번 마주칠 때마다 당장에라도 붙잡고 키스하고 싶은데 이걸 억누르는 것도 일이구나. 이렇게 너와 나누었던 지난 이야기라도, 실없는 이야기라도 보지 않으면 미칠 것 같다.


***


"야, 박지민. 나랑 자리 좀 바꿔 줘."
"....왜."


날 마의 바다 버뮤다 삼각지의 꼭짓점에 갖다 놓고 말려 죽일 생각이냐. 지민은 불신이 가득한 표정으로 보고 정국은 인상을 조금 찡그렸다.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거냐. 이제는 나와 함께 앉는 것도 싫어서? 그렇게까지 이제는 내가 싫어? 보기만 해도 혐오스럽고.... 그래? 정국이 새삼스레 상처 입은 듯 묘한 얼굴로 바라보는 것도 무시하는데 지민이 고개를 내저었다.


"싫어. 너희 싸운 거 아는데 나까지 거기에 끼워 넣지 마. 그리고 나 너희 화해할 때까지 현우네랑 밥 먹고 집에 갈 거야."
"넌 자리를 바꾸게 될 거야."


생글생글 웃는 태형의 얼굴이 수상하다. 그러나 지민이 그건 무슨 개소리냐는 듯 한 번 찡그린 인상을 하고 휙 돌아서 서랍에서 다음 수업 시간에 필요한 책을 꺼내다가 다시 인상을 팍 썼다. 책 표지의 교과서 이름을 이상하게 바꿔놓고 검은 컴퓨터 사인펜으로 낙서해 놓은 지저분한 책. 태형의 책이다. 평소에 자는 거 아니면 교과서에 낙서하기 좋아하던 태형의 취향답게 참 너저분한 책을 보고 지민이 설마 하는 마음에 책상 서랍에 있던 책을 모조리 꺼낸다. 이것도 태형이 거, 저것도 태형이 거. 에블바디 올 김태형 거. 박지민의 책상에 김태형의 책과 필기구 몇 개가 다 들어가 있는 마법.


아마 지민이 다른 친구와 밥을 먹으러 갔을 때 다 바꿔놓은 모양이다. 지민의 이마에 핏대가 서고 책을 모조리 집어 태형의 책상에 탁 올려놓았다.


"안 바꾼다고! 너 내 책은 어쨌어, 네가 가지고 있냐?!"
"어. 나 네 책 인질로 잡고 있다. 바꿔."
"내가 왜! 싫어!"
"네 책을 죄다 불 싸질러도 된다 이거지?"


으아아, 돌겠네! 지민이 머리를 감싸 쥐고 절규했다. 공부 쥐뿔도 안 하는 너와는 달라서 난 하는 놈이라 책 필요하다고! 어쩌다 저런 웬수같은 걸 친구로 둬서 내가 이런 신세가 됐을까. 결국 책을 그냥 돌려받지는 못할 것 같으니 자리에서 일어난 지민이 태형의 자리로 왔다. 정국의 짝이 태형이 아닌 지민이 된 것이다. 그것에 정국의 마음이 또 안 좋다.


저렇게 할 정도로 나랑 있는 게 싫은 거구나. 날 더럽다고 생각했을까? 나는 김태형이 이렇게 좋은데 왜 이렇게 내 마음을 몰라주는지. 옆에 앉은 지민을 힐끔 보고서 책상 한가운데에 선을 하나 찍 긋는다. 너 여기 넘어오면 죽어. 무슨 초딩도 아니고 유치한 짓을 하고 있다. 나는 너희 친구가 아니냐고. 김태형이 엎드려 자면서 데굴데굴 굴러와 이 금보다 훨씬 더 많은 자리 차지하고 정국의 영역까지 머리 들이밀고 자는 거 매일 봤는데! 어흐흑, 서러워. 나 이런 대접 받고 못 살아. 오열하는 지민을 무시하고 태형의 뒤통수만 본다. 나쁜 새끼, 내 마음 다 흔들어놓고 도망갔어.


그리고 학생들에게 있어 학교에 있을 때 가장 시간 많고 학생이 가장 많이 모이는 때가 점심시간과 식당이렷다. 지민은 오늘도 다른 친구와 함께 밥을 먹으러 왔다가 낯익은 얼굴이 보이는 걸 보고 조용히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식판을 내려두었다. 그러자 왜 그러냐며 묻는 친구도 무시하고 이마에 핏대가 잔뜩 선 상태로 씩씩거리며 누군가에게로 다가가 멱살을 잡았으니, 그 상대가 민윤기라는 건 안 비밀. 윤기와 함께 점심 먹으러 내려왔던 석진과 남준, 호석도 놀란 눈으로 바라보다 애써 지민을 떼어놓으려 했으나 그 쪼끄마한 몸에서 도대체 힘이 어디서 나오는 건지 도통 놓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당신 때문이야!"
"이거 안 놓을래? 뭔데, 갑자기?"
"당신이 그날 전정국 안 데리고 갔으면 우리 그런 것도 안 듣고! 내가 버뮤다 삼각지대에 끼지도 않았을 거고! 죽음의 어색함에서도 벗어났을 거예요!"
"....엉?"


....그 후 그날은 2학년 또라이가 3학년 또라이의 멱살을 잡은 역사적인 날로 기억되었다.


애써 남준이나 호석, 석진에게 괜찮다는 말을 하고 지민을 데리고 바깥으로 나왔다. 오늘은 밥도 못 먹겠군. 학교에 나오는 낙이라면 잘 나오는 급식과 꿀 같은 수면시간인데. 귀찮다는 듯 뒷머리를 긁적이던 윤기가 지민을 본다. 여전히 씩씩거리는 모습이 조금 애 같기도 하고. 그런 애가 교정의 낮은 계단에 앉아 툴툴거리다가 자초지종을 다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윤기가 정국을 데리고 나가 그런 이야기를 했던 날 태형은 전정국이랑 개처럼 싸우고 그 뒤로 내리 냉전. 거기에 끼어있는 불쌍한 어린 양 박지민은 어색함에 죽어버릴 것 같은 기분. 흐응, 이거 일이 영 좆같이 흘러가는데. 시큰둥하게 듣고 있던 윤기가 지민에게 한마디를 툭 던진다.


"그럼 너 가서.... 그래 봐."
"뭐라고 해요?"
"전정국이 있는 앞에서 해. 가서.... 계집애 하나 소개시켜준다고 해."
"내가 아는 여자가 어디 있어요...."
"....너 찌질한 거 아니까 말만 그렇게 하라고."
"씨, 아니거든요? 근데 그런 말 해도 되나?"
"네가 그렇게 하면.... 전정국이 알아서 반응할걸?"


내가 아는 그놈이 전정국이라면 말이지. 어쩐지 싱글벙글 웃는 윤기의 얼굴에 내심 불안해지는 지민은 고민한다. 저 인간을 믿어도 될까.


[국뷔] 흔한 18세 남고딩의 로맨스 데이 04 방탄소년단 팬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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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뷔] 흔한 18세 남고딩의 로맨스 데이 04
W. 국빛


"그래서 그 시간까지 남아있었으면서 범인을 못 잡았단 말이야?"
"응! 짜증 나!"
"푸핫, 너희 뭐한 거야. 옆에 정국이도 있었잖아? 정국이도 못 봤어?"
"어? 응. 일단 김태형은 나한테 기대서자고, 난 화장실 다녀온 사이에 이미 칠판에 답이 쓰여 있더라고."


어쩐지 정국의 등 뒤로 식은땀이 삐질삐질 흐르는 것 같다. 사실 학교 측에서 마련한 그 화이트 보드, 처음에는 반은 장난이고 나머지 반은 진심으로 쓰기 시작한 건데 일이 점점 커지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한데 옆에서 씩씩거리던 태형의 모습이 자꾸만 아른거려서 마음이 더 좋지 않다. 그래서 그만둘까도 생각했지만 그 생각이야말로 그만두기로 했다. 정국이 그런 수고스러움을 감수하는 이유는 하나였기 때문에. 도통 어린 시절부터 자기 마음을 몰라주는 태형이 얄밉기도 하고 애가 타기도 해서 내 마음 좀 알아달라고 일종의 시위 같은 걸로 하고 있던 중이니까.


하지만 점점 노골적으로 쓰여지는 답으로 인해 태형의 성격이 날로 포악해지고 있음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도대체 어떤 놈이 그러고 있는 거냐며 씩씩거릴 때마다 정국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은 기분이 들고 있어 지금도 애써 옆과 앞에서 칠판맨에 대해 재잘거리고 있는 태형과 지민의 대화를 무시하려고 애쓰고 있다. 저걸 듣다 보면 양심의 가책을 느껴서 사실 그건 내가 썼다고 다 불어버릴 것 같았으므로. 윽, 진짜 나중에 들키면 나 죽는 거 아닌가 몰라.


....그래도 김태형 잘못이다, 뭐. 전정국이 이렇게 좋아 죽겠다고 티 내고 있는데, 정작 당사자인 태형만 모르고 다른 사람 다 아는데 김태형만 몰라주니까! 김태형이 너무 예쁜 잘못이야. 내 잘못은 없다고. 정국이 콧방귀를 뀌었다. 아마 태형은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것이다. 정국이 자신이라는 걸 들키지 않기 위해서 얼마나 혼을 갈아 넣고 날림 글씨로 답을 쓰는지. 필체를 보면 정국의 글씨라는 걸 알아차릴까 싶어서 기회를 봐 빠르면서도 자신임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필체를 완전히 바꿔서 쓰고 있다는 것을. 그렇게 해서라도....


전정국이 김태형을 이렇게나 많이 좋아하고 있다는 걸 표현하고 싶은 거라고.


***


그러나 영원한 비밀은 없다고 했는가. 그 비밀은 오랫동안 지속할 것 같았지만 꼭 그런 것도 아닌 모양. 그것도 정국의 입으로 직접 그게 나라고 얘기한 것도 아니고 뜻밖의 인물이 정국을 불러냈기 때문이었다. 윤기. 이 모든 속사정을 다 알고 있는 그는 인생을 전정국 놀리는 맛으로 사는 사람인 것 같았다. 점심시간에 밥을 먹고 올라와서 지민을 포함해 셋이서 방과 후에 PC방을 가네 마네하고 있었는데 교실 앞문에서 비스듬하게 서 있던 윤기가 정국을 불렀다. 그걸 보고 태형이 지민에게 눈짓한다. 그러자 지민이 그 뜻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듯 씩 웃으며 벌떡 일어난다. 가자, 전정국 감시대 출동!


그렇게 해서 여기에 왔는데,


"너 그거 언제까지 비밀로 할 거냐?"


뭐가 비밀이라는 건지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구석에 숨어 보고 있었는데,


"차라리 깔끔하게 불어버리는 게 낫지 않아? 너 요새 존나 유명해졌더만. 전교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이런 얘기가.


"칠판맨."


윤기가 픽 웃으면서 정국을 보며 칠판맨이라고 하자 태형과 지민이 동시에 경악한다. 가장 생각지도 못했던 사람이 칠판맨이라니. 지민은 진짜 전정국이 칠판맨이었어? 이 수준에서 그쳤지만 태형의 낯빛은 점점 좋지 않다. 얼굴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배신감이 밀려들었다. 그동안 자신이 그 칠판 때문에 어디 한 번 지나갈 때마다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다 알면서, 자기가 그 칠판 때문에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정국이 제일 잘 알았다. 그래, 가장 잘 안다는 놈이 그런 짓을 했다 이거지.


....얼마나 우스웠을까. 곁에서 제 모습을 다 지켜보고 있던 놈인데, 그 범인 한 명 잡겠다고 불철주야 눈에 불을 켜고 있던 제 모습이 얼마나 웃겼을까. 범인 잡겠다고 했을 때 잘해보라며 엎드리면서 속으로 얼마나 웃었을까. 자꾸만 삐뚤어진 마음이 생긴다. 정국의 마음을 전혀 알아주지 않는 것도 여전하고,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전정국이 그랬다는 것에 태형의 표정이 점점 굳어가는 걸 보고 힐끔거리며 눈치 보던 지민이 생각했다. 이거, 완전 좆됐네....


"내가 태형이라면, 그 얘기를 나중에 들으면 존나 빡 칠 것 같은데."
"....그래요?"
"그렇지. 걔 성격상 그거 쓴 놈 잡겠다고 악을 썼을 거 아니냐. 안 봐도 비디오지. 그 욱하는 성질머리가 어디 가겠어? 차라리 그냥 일찍 얘기하는 게 낫지 싶다."
"김태형에 대해 엄청 잘 아네요. 나 도와주겠다고 했잖아요."
"너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걔 어릴 때부터 봐온 사람 중 한 명이 난데, 그럼. 돕고는 싶은데 생각해 보니 나중에 뒷감당할 때 나한테까지 불똥이 튈 것 같으니까 그렇지. 나 귀찮은 거 사절."
"그럼 안 도와줘도 돼요.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거기까지 해, 그만 얘기해. 이 미친놈아...! 지민이 턱 끝까지 차오른 말을 뱉고 싶어 안달 난 듯했다. 옆에서 점점 분노 게이지가 상승하고 있음이 뻔히 보이는 태형을 보면서 눈치만 보던 지민이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정국은 지금 상황이 이렇다는 것도 모르고 윤기에게 하나부터 열까지 다 조잘거리고 있음에 이럴 땐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스스로 처세술을 먼저 생각하고 있던 지민이 쓴웃음을 지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따라오지 말걸. 중간에서 굉장히 피곤해질 것 같다. 태형의 눈에서는 이미 레이저가 나오는 것 같고 몸 주변으로 불꽃이 튀는 것 같은 환영이 보일 지경인데 저 인간들의 대화는 언제 끝나는 걸까.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산 같은 태형을 힐끔 본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윤기와 정국을 번갈아 본다. 차라리 아무것도 몰랐던 게 좋았지.


"칠판.... 일단 그거 계속, 쓸 거예요."
"그렇게까지 해야 돼?"
"....내 마음 전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요. 매일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어서 미치겠는데, 가슴이 터질 것 같고 답답한데 나는 김태형한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그렇게라도."


들려오는 말에 결국 태형이 폭발했다. 머리끝까지 화가 났는지 만류하는 지민의 손길도 뿌리치고 전면에 나선다. 정국과 윤기의 앞으로. 생각지도 못한 태형의 등장에 놀란 건 둘 다인 것 같다. 둘 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얘가 왜 여기 있냐는 듯한 얼굴로 보다가 윤기는 이제 난 모르겠다.... 하면서 너희끼리 잘 풀어보라는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떠버린다. 지나가다가 숨어있던 지민을 보고 아무 말 없이 지민의 목덜미에 팔을 걸어 질질 끌고 갔지만. 어린 애들은 저런 거 보는 거 아니에요.


"하하."
"김태형. 네가 왜 여기, 아니.... 혹시 들었어?"
"뭘?"
"아, 못 들었...."
"네가 칠판맨이라는 거?"
"......."
"재미있었냐? 그동안 내가 그걸로 스트레스 받는 거."
"태형아. 내 말 좀 들어 봐."
"뭘 들어. 더 뭘 듣는데. 너 얼마나 재밌었어? 내가 그 새끼 잡겠다고 늦게까지 학교에 남아있는 거 보면서 얼마나 재미있었어? 무슨 생각 하고 있었냐? 날 엿먹이고 싶었던 거면 차라리 듣기 싫은 욕이나 실컷 하지, 전교생 앞에서 망신 주면서까지 그러고 싶었냐?"
"김태형. 내 얘기 좀,"
"시끄러워! 들을 얘기 없어, 듣고 싶지도 않아! 내 제일 친한 친구라는 놈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 너 내가 물었지, 너 아니냐고! 너 그때 뭐라고 했어? 나랑 같이 있었다고 대답하면서 아니라고 했잖아. 거짓말도 했네?"


평소라면 말도 조금 더듬고, 횡설수설 제대로 하지도 못하던 태형이 정말 화가 많이 났는지 아무런 표정도 없이 잘도 말한다. 그 말 하나하나 전부 정국의 가슴에 비수가 된다. 그런 게 아니라고, 그런 의미로 한 게 아니라고. 태형이 곤란하게 하려고 한 짓이 아니라고 말해야 하는데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 오랜 시간을 함께했지만 태형이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 건 좀처럼 보기 어려운 일이다. 별명이 김스치면 인연, 이라고 할 정도로 성격이 밝고 붙임성도 좋고 귀여워서 모든 이에게 사랑받는 게 태형이다. 살면서 김태형을 싫어하는 사람을 한 명도 보지 못했을 정도였으니 타인과의 트러블도 그리 많지 않아서 화를 내는 일은 극히 드물다. 그런 사람이 정국에게 이렇게 화를 낸다는 건 잘못하면 끝을 말한다는 것. 그만큼 좋은 사람이면서, 한 번 아니면 영원히 아닌 구석이 있으니까. 그래도 애써 힘겹게 입을 뗀다. 떨어지지 않으려 하는 입이 제멋대로 말을 뱉어낸다.


"....넌.... 나 안 좋아하잖아."
"뭐?"
"내가.... 이렇게 널 좋아해도, 너는 아니잖아."
"뭐라는 거야, 씨발. 제대로 설명해."
"지금보다 훨씬 어릴 때부터 널 좋아했어. 너 조금 전에 윤기 선배랑 얘기하는 거 다 들었으면 알 거 아냐."
"그래서 이런 짓을 한 거라고?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그럼 어떡하라고, 나는!"
"......."
"그래. 미안해. 너 얼마큼 스트레스받고 얼마나 힘들었는지 내가 제일 잘 알아. 항상 옆에 붙어있었으니까. 왜 몰라, 그걸. 그래도 난 어떡하라고. 그런 마음을 가져도 너한테 말 한마디 못하고 살았는데, 그렇게 답답했는데. 힘들어 죽겠는데! 그런데도 너한테.... 좋아한다고 말을 할 수가 없으니까.... 방법은 틀렸어. 그건 인정해. 하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조금만.... 아주 조금만이라도 널 좋아하고 있다고.... 표현하고 싶었어."


기가 막힌 듯 하, 헛웃음을 지었다. 이렇게까지 얘기했는데도 그 진심은 태형에게 다 닿지 않았나 보다. 그러지 못했나 보다. 화를 잘 내지 않는 사람이 낼수록 더한 힘을 가진다는 걸 정국이 모를 리 없다. 태형이 화내면 더 그렇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간절했다. 매일 상상했다. 태형에게 한 번만, 단 한 번만이라도 내가 널 좋아하고 있다고 제대로 이야기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고백하는 생각을 하면서 매일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그래도 영원히 말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면 안 되는 거니까. 말하면 아슬아슬하게 이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친구 관계조차도 깨질 것만 같으니까. 그래서 비겁하게 한발 물러서서 행하는 그런 방법을 택했다. 사실 정국도 약간 철이 없다 싶은 게, 처음에는 정말 반은 장난으로 썼던 일. 그게 이렇게 큰일이 될 거라고는 생각 못 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결국 후를 생각하지 않고 무작정 태형에게 표현하고 싶다는 게 밖으로 표출돼서 일어난 일.


화가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다. 반 아이들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그 사람 정체가 전정국이라고 떠벌릴 생각도 없지만, 밀려오는 배신감에 저절로 몸이 떨렸다. 다 알고 있었으면서도 모르는 척했다. 그게 태형에게는 좋아한다고 고백한다기보다는 그저 자신에게 수치심과 놀리려는 의도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화가 난 상태에서는 정국의 마음이 보이는 게 더 이상하다. 결국 태형이 정국에게서 등을 보인다. 그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고 경멸하는 표정과, 돌려버린 등에 정국이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태형아...."
"......."
"가지 마. 너 이렇게 나한테서 등 돌리고 가 버리면 난 어떻게 해야 돼."
"....내가 묻고 싶네. 내가 널 어떻게 해야 돼?"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내 마음 알아주지 않아도 좋으니까 가지 마. 너 지금 여기서 가게 내버려 두면 평생 못 볼 것 같아."
"어."
"태형아."
"방금 그 말, 정답이야."

"미안해. 미안해, 태형아."

"날 좋아해서 그랬다고? 아니. 넌 네 생각만 한 거야, 내 생각은 눈곱만큼도 안 한 거라고. 네가 진짜 나한테 미안했으면 이럴 수는 없어. 들키기 전에 그만두기라도 했겠지."

"......."

"넌 끝까지 너만 생각한 이기적인 새끼야."


정국을 두고 간다. 이미 화는 날 만큼 나고, 정국의 말도 듣지 않고 마음은 더 보지 않으려 한 태형이 그대로 돌아서서 교실로 돌아간다. 그 모습에 정국이 무너질 듯 주저앉아버린다. 쪼그려 앉아 잘 쉬어지지 않는 숨을 애써 크게 뱉으면서 이마를 짚었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눈앞이 캄캄해졌다. 우려하던 일이 생기고 말았으니까.


혹시라도 태형에게 들키는 날에 이런 일이 생기지 않을까 싶어서 칠판맨이 되고 난 이후로 마음이 편할 날이 없었는데. 이런 일 아예 생각 못 한 것도 아닌데 막상 겪고 나니 상상을 초월하는 통증이 가슴을 파고든다. 미친 듯이 아파져 오는 가슴에 이를 악물어보지만 이미 머리카락 한 올 남기지 않고 휑하니 사라진 태형은 돌아오지 않는다.


"하...."


한숨이 절로 나오고, 욕설도 저절로 나온다. 내가 바란 건 이런 게 아닌데. 언제까지나 친구로라도 곁에 있으면서 항상 같이 있는 거였는데. 그런 사이라도 좋으니까 그냥 함께 있고 싶었을 뿐인데. 왜 이렇게 됐을까.... 왜, 대체 왜. 아니, 모순인가. 친구로 충분히 만족했다면 그런 짓은 안 했을 테니까.


아무리 정국이 지금 있는 장소가 조금 외졌다고는 하지만 복도 구석에 있는 교실 창문에서 내려다보면 충분히 보인다. 윤기가 있는 반은 3학년 중에서도 가장 끝반에 가까운 만큼 복도 끝 구석에 처박혀있고, 그래서 윤기가 교실로 돌아가서 창문 너머로 내려다보다 인상을 찡그린다. 저 새끼, 결국 잘되지는 않은 모양이네. 건물이 높은 만큼 말소리는 잘 들리지 않지만 주저앉아있는 정국의 정수리를 가만히 보다가 턱을 괴었다. 이거 괜히 미안한걸.


그래도 귀찮다. 자기들이 알아서 하겠지.


결국 제자리로 돌아가서 푹 엎드려 잠을 청하는 윤기였다.


[국뷔] 흔한 18세 남고딩의 로맨스 데이 03 방탄소년단 팬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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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뷔] 흔한 18세 남고딩의 로맨스 데이 03
W. 국빛


"진짜 왜 저러고 있는 거냐. 밥 먹고 왜 저런 쓸데없는 짓을."
"먹은 거 대비해서 의미 없이 체력을 탕진하기에는 저거랑 축구만큼 좋은 게 없지 않겠어?"
"점심 먹은 건 힘차게 남은 교시에 잘 때 써야지!"
"그거야 네 생각이고. 그러다 또 그 이마에 분필 맞고 싶어서 그러냐? 그래도 봐. 난 쟤들 저러는 거 보고 여기 남녀공학인 줄 알았다."


지민과 나란히 계단에 앉아서 후식으로 딸기 우유를 하나씩 물고 구경하던 찰나였다. 도대체 언제 온 건지, 고작 경기장 전체도 아니고 반 코트만 쓰고 심지어 정국과 윤기 둘이서만 공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농구를 하고 있는데 어느새 그 좁은 경기장을 빙 둘러싸고 태형처럼 계단에 앉거나 서서 소리치며 응원하고 환호하는 남학생들을 보고 안색이 좋지 않아졌다. 도대체 남녀공학처럼 여학생이 와서 '꺄악! 오빠 멋있어요! 파이팅!' 이러는 것도 아니고 다 큰 사내놈들이 같은 사내놈들을 응원하는 건 뭐란 말이냐. 그리고 그건 소문에 소문을 불러 점심시간에도 밥만 먹고 바로 공부하기 바쁠 3학년들도 몇 명 와서 구경하고 있음을 알고 먹던 딸기 우유를 조용히 내려두었다.


"뭐야, 무서워. 이러다 전교생 다 올 것 같고 막."
"설마. 근데 왜 저렇게 왔는지는 알 것 같은데? 너 같으면 학교에서 유명한 또라이들이, 그것도 학년도 다른 놈들이 코트씩이나 차지하고 저러는데 구경 안 오겠냐."
"그 또라이 중 한 명은 너라는 걸 잊지 마, 지민아. 네 생각대로라면 여기 벌써 그런 사람 세 명 모여있는 거거든?"
"네 명이지 왜 세 명이야. 너도 포함이라는 걸 잊은 거니, 우리 태형이는?"
"시끄러워."


그러면서 세운 무릎에 턱을 괴고 멍하니 정국을 보는데 아까부터 계속 헛손질이다. 워낙 농구를 잘하는 게 윤기라 학교에서도 유명하긴 했지만 그래도 너무 속수무책으로 점수를 내어주고 있는 걸 보면서 저럴 거면 왜 농구하자고 했을까 하고 있는데 한참 뛰어다니던 정국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자신이 보기에도 너무 형편없을 정도로 쉽게 점수를 내주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 듯 시선을 피해버려 태형이 지민을 붙잡고 낄낄거렸다. 쟤 진짜 쪽팔린가 봐. 나랑 눈도 안 마주치려고 해. 그러면서 웃는 걸 보고 그거 너 때문인 것 같은데, 라고 차마 말을 하지 못한 지민이 입을 꾹 다물고 그냥 경기를 보고 있었다. 그러고 있는데 저만치에서 누군가 태형 역시 여기에 있음을 알았는지 사람들 다 듣는 곳에서 소리를 지른다.


"전정국 이겨라! 지면 태형 공주는 내가 납치할 거다!"


....뭔 주? 공주? 이건 무슨 신종 개소리인가 하면서 고개를 돌려보니 같은 반 녀석이었다. 사실 태형만 모를 뿐 지민을 포함해서 같은 반 아이들은 얼마나 전정국이 김태형을 싸고돌고, 주변에 다른 사람이 있으면 싫어하는지 잘 알고 있다. 전에 축구할 때 패기 넘치게 골키퍼를 하겠다고 설치던 태형이 공을 잘못 막아서 손으로 받은 게 아니라 부딪혀서 다치던 날에 정국은 그다음부터 그 김태형의 손을 맞춘 공찬 놈을 집중적으로 마크해서 공격하다가 자빠뜨리고 '미안.'하는 한마디만 하고 웃으며 사라졌고, 김태형이 여자 연예인 누구를 좋아한다더라 하는 말을 들은 동급생 녀석이 장난으로 화장실 벽에다 김태형♥OOO이라고 썼다가 범인을 찾을 때까지 정국이 날뛰었는데 동급생이라는 걸 알고 그 녀석은 온종일 염불을 외는 듯한 정국의 속삭임을 들어야 했다. '김태형은 그 여자 안 좋아해....' 라는 똑같은 말만 반복하는 것을. 그 외에도 유명한 일화는 많았는데 쟤는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저런 짓을. (실제로 이런 행동들이 전정국 역시 전교에서 유명한 또라이로 만드는 것에 일조를 가했다.)


그 수많은 일화 중 하나라도 아는 이는 그 동급생의 명복을 빌고 있는데 좀 전까지만 해도 힘조차 제대로 못 쓰고 공 따라가기만 바쁘던 정국이 윤기의 손에서 놀아나던 공을 휙 뺏어 든다. 그리고 골! 을 넣는 게 아니라 퍽! 태형 공주 운운하며 납치하겠다고 했던 동급생의 얼굴에 깔끔하게 명중.


"미안, 실수야."


....실수....


누가 봐도 고의였는데. 공을 골대 쪽이 아니라 사람 쪽으로 두고 팔 쭉 뻗으니 나비처럼 아름답게 날아가 벌처럼 날카롭게 쏘는 공을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이 다 봤는데.... 경기장 전체를 쓰고 반대편 코트에도 다른 사람이 있었다면 패스하다가 그랬거니 하겠지만 둘만 날아다니는 경기장에서 저 무슨. 하지만 억울하다는 듯 울상을 짓던 동급생을 바라보는 전정국의 표정이 너무 살벌해서 차마 뭐라고 토 달지도 못하겠다.... 왜 이리로 던졌냐고 따지면 실수라는 말만 반복하면서 고의로 때려 죽일 기세. 윤기 역시 가만히 보고 있다가 피식 웃어버리고, 계단에 앉아있던 태형이 내려와 정국에게 어깨동무를 했다.


"야, 고맙다. 쟤는 맞아도 싸. 나처럼 잘생긴 남자한테 공주는 무슨. 그렇지?"
"너 공주 맞아. 완전 제멋대로 말괄량이. 그리고...."
"아니거든? 차라리 왕자 시켜 줘. 그리고 또 뭐?"
"아니야."


뒷말은 하지 않고 삼켜버린다. 정국의 목구멍 너머로 넘어간 말은 한마디였는데 아마 조금 더 시간이 많이 흘러가야 나올 말. '예쁘니까.' 그리고 납치는 무슨 납치야. 정국이 들리지 않게 혼자 투덜거린다. 김태형은 내 건데. 하나같이 다 마음에 안 들어. 곧 예비종이 치는 걸 듣고 공을 챙기던 윤기가 둘을 힐끔 보더니 입꼬리가 예쁘게 올라간다.


"먼저 들어간다. 다음에 봐, ....태형 공주."


정국에게도 손을 휘휘 저으면서 들어가는데 선배라서 어떻게 할 수도 없고, 정국의 이미에 핏대는 서고. 지금 저거 일부러 놀리고 간 거다! 이를 으득 갈고서 생각했다. 도대체 민윤기, 저 인간은 날 도와주겠다는 거야, 말겠다는 거야? 아무것도 모르는 태형은 또 공주라고 불렸다면서 쪽팔린다고 투덜거리고 있는데 짐짓 심각한 정국이었다. 참 마음에 들면서도 안 드는 사람이란 말이야.


다 알고 있으면서.


***


그리고 여전히 정체를 알 수 없는 칠판맨은 활약을 잘도 하고 있었다. 화이트보드에 적는 답이라고는 오로지 김태형으로 시작해서 김태형으로 끝나는 답이었는데 정 안 되겠다 싶었던 학생 주임이 다시 열린 교무회의에서 그걸 더이상 진행하지 말자며 장난으로 답을 쓰는 학생이 있어 제법 골치가 아프다 했지만 그 의견은 철회되고 말았다. 그렇게 한다는 걸 안 학생들이 나서서 계속 진행해 달라고 조른 것도 있고 몇 명의 선생님 역시 그 괘씸한 범인을 잡기 전에 내리는 것은 아니다, 라고 쓰고 사실은 그 또라이 같은 답변을 더 보고 싶다고 읽는 의견으로 인해 그렇게 되었던 것. 그래서 결국 철회하지 않은 화이트보드는 오늘도 하얀 몸통 위에 해괴한 답이 달린다.


올해 가을에 열릴 축제에서 보고 싶거나 하고 싶은 것은 무엇입니까?
김태형의 스트립쇼 (이건 내 앞에서만)
김태형의 섹시댄스 (이것도 내 앞에서)
김태형의 공개고백 (나한테 하는 거 아니면 의미 X)


그리고 그 당사자인 태형은 여기. 화이트보드 앞에서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이를 갈았다. 도대체 또 어떤 후레자식이...! 오늘은 또 답을 열 맞춰서 세 개나 써 놨네, 이 지능적인 새끼가? 여전히 물이 흐르는 것 같은 날림 글씨를 보면서 떨고 있는데 주변에서 웃는 소리가 들리자 화가 머리끝까지 난 태형이 보드마카를 집어 든다. 그리고 그 밑에 리플을 달았다.


너 자꾸 개소리 써 놓으면 나 전학 간다.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힘을 줘 눌러서 써 놓고 보드마카를 내팽개친다. 진짜 열 받아!!! 잠복을 하고 있어도 영 잡히질 않고, 도대체 뭐냐고!!! 씩씩거리면서 교실로 돌아와 세차게 문을 열어젖히자 반 아이들도 태형을 힐끔거리면서 웃다가 묻는다. 너 진짜 스트립쇼 할 거야? 섹시 댄스 콜? 공개고백은 그거 누구인지 몰라서 못 하지 않나? 야, 어떤 미친놈인지는 몰라도 진짜 대박이다. 학교 다니기 존나 싫었는데 요새 너랑 그거 보는 재미로 다녀. 존나 고마움. ....점점 태형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형형색색으로 물드는 걸 먼발치에서 보던 지민이 조용히 외면했다. 쟤들 이제 죽었네.... 그리고 그날은 태형 공주가 책상을 뒤엎은 날로 기억되었다.


겨우 자리에 돌아와서 입술을 쭉 내밀고 심통 난 표정으로 앉자 옆의 정국이 한쪽 팔만 뻗어 엎드려서 나른하게 물었다.


"....나 이제 집에 안 들어갈 거다."
"가출이라도 했냐? 그리고 네가 엎은 저 책상들 다 세워놓고 와, 바보."
"알아서 하라고 해. 씨발, 지들이 안 당해봐서 저런 말을 하는 거야!"
"그래, 그래.... 그래서 집에는 왜 안 들어가는데. 부모님이랑 싸우기라도 했어?"
"아니, 부모님이랑은 사이 너무 좋아서 탈이고. 다시 잠복근무를 하겠어. 이 학교에서."
"....미쳤냐?"
"안 미쳤어. 나 진심이야. 부모님한테는 학교에서 중요한 일 한다고 하고 그 칠판 근처에서 지키고 서 있을 거야. 어떤 씨발놈인지 진짜!"
"그냥 무시하라니까. 아니면 그 화이트보드를 없애든지."
"그거 없앴다가 학교에서 초상 날 일 있냐. 학주도 잡아 오라고 했으니까 내 친히 잡아서 대령해 주지...."
"같이 있어줘?"
"당연하지. 김태형 가는 데에 전정국이 없으면 어떻게 해. 우린 실과 바늘인데."
"그게 무슨 뜻인지는 알고? 그래, 뭐.... 친구가 그런다는데."


그리고 다시 제대로 엎드려서 잠을 청하는 정국이다. 친구, 친구니까 그런 건 해 줄 수 있는 거라고? 그것 참 명분은 좋네. 친구라서. 김태형과 나는 친구니까 나는 그런 짓밖에 할 수 없는 거라고. 아무것도 모르는 저 둔팅이 김태형은 아마 죽을 때까지 이 마음 모르겠지만. 알아서도 안 되는 거지.


내가 지금보다 더 어릴 때부터 김태형을 좋아했다는 걸, 태형이가 알면 나를 버리고 떠나버릴지도 모르니까. 오랫동안 친구로 지내왔고 또 같은 남자가 자기를 좋아한다는데 얼마나 큰 충격이고 싫겠어.


내가 이러니까 늙지, 늙어. 김태형 덕분에 하루 새에 한 오십 살은 더 먹은 것 같다. 차라리 나나 태형이 중 한 명이 여자였다면 조금 더 편했을까. 그러면 차라리 편하게 너를 사랑할 수 있었을까.... 이 편견 가득한 세상에서 좀 더 편하게, 대놓고 김태형이 좋다고 이야기할 수 있었을까. 아닌가. 그러면 얘랑 같은 학교도 못 왔겠다.


사실 전정국의 성적은 이 실업계가 아니라 지역에서도 내로라하는 인문계에 갈 수 있는 성적이었다. 초등학생 시절부터 장난칠 생각만 하고 즐거움만 추구하는 또래 어린아이들과는 다르게 영민한 머리의 두각을 나타내던 정국은 중학교에서도 내리 전교 1등을 놓쳐본 적 없고 고등학교에 와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만큼 머리도 좋고 성적도, 내신도 좋았던 정국이 돌연 김태형을 따라 이 학교에 오겠다며 원서를 써 달라고 했을 때 좌절하던 선생님 얼굴은 아직 잊지 못했다. 도대체 왜, 뭐가 아쉬워서 정국이 태형을 따라서 온 건지는 정국의 부모님이나 중학교 때까지 알고 지내던 친구들마저 이해하지 못했다.


김태형이 뭐라고, 자기 미래까지 포기하는지. 물론 기술 배워서 바로 취업계로 나가면 좋을지도 모르지만 확실히 정국의 머리는 그 정도에 머무르기엔 무언가 굉장히 아까운 것이었으니까. 아마 인문계에 가서 공부만 파고 있었으면 전국에서도 좋다고 손꼽는 대학까지 탄탄대로로 갈 수 있을법한 머리를 가졌으나 그걸 태형 때문에 전부 포기하고 미래의 진로마저 바꾸고 있는 그를 보면서 사람들은 다들 미련하다고 했다. 손가락질도 했다. 친구 한 명 잘못 사귀어서 저렇게 되었다며 욕도 서슴지 않는다. 그래도 사실 정국에게는 그런 것 따위 신경 쓰지 않을 정도로 소중한 것이 있었다. 너무나 소중하고, 귀해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그래서 제가 가진 것들을 포기해도 아깝지 않은 것. 사랑이었다.


김태형을 향한 어린 날의 소유욕이 점점 자라면서 사랑으로 바뀌었음을 알고 어리던 정국은 앞날을 다 바꿔도 좋다고 생각할 만큼 태형에게 미쳐있었다. 사랑하고 있었다. 그래서 남들의 잣대와 쓴소리도 모두 견딜 수 있었다. 그런 태형이 다른 이에게 간다는 건 상상조차 하기 싫은데, 싫은데 태형은 정국을 오직 사이좋은 친구쯤으로 생각하고 있으니 정국의 속앓이는 커져간다. 아무도 모르는 짝사랑 하고 있는데 김태형은 김태형 나름대로 삽질하고 있고. 가여운 내 인생아....


***


그래서 지민은 먼저 집에 돌아가고 다른 학생들 역시 하교하느라 학교에 아무도 안 남았을 때, 학생 주임이 와서 화이트보드를 한 번 다 지우고 새 질문을 쓰고 퇴근하는 걸 본 후로 쭉 계단 구석에 앉아 기다리고 있는 중. 혹시라도 범인이 왔을 때 모습을 들키면 안 된다며 머리에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분홍색 보자기를 둘러쓰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린다. 어차피 중앙 계단은 이름에 걸맞게 넓고 길고 높았으니 중앙 현관에서 보이지 않는, 1학년 교실 쪽으로 연결된 곳에 앉아있다가 아래층에서 인기척이 느껴지면 보기로 하고 꼼질거리는데 벌써 한 시간도 넘게 기다려서 슬슬 지루해지는 모양이었다.


"에이 씨.... 안 오네."
"범인이 병신이냐. 너한테 잡히게."
"누가 병신이야. 이런 거 잡을 땐 잠복하는 것보다 좋은 건 없다고. 조용히 해, 꼭 잡고야 말 테니까."
"네, 네. 잘해 봐."
"근데 정국아. 나 졸려. 아까 5교시랑 6교시에 다 나 깨워서 제대로 못 잤어."
"어쩌라고."
"어깨 좀 빌려 주라."


쯧. 이럴 줄 알았지. 역시 잠시라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김태형이 이렇게 한 자리에 부동자세로 있는 게 얼마나 힘들었을까. 가만히 앉아서 손가락만 매만지다 결국 한다는 소리가 졸린다는 거라 기꺼이 한쪽 어깨를 내어준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거기에 기대서 눈을 감고 잠을 청하는 모습에 내가 뭐하러 이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있는 건지 잠시 생각하던 정국의 곁으로 낯익은 사람이 지나간다. 석진이었다. 학생회 일로 바쁘다던, 잘생겼는데 식탐이 너무 과해서 먹을 거 하나 뺏어 먹은 동급생에게 이래저래 악랄한 짓을 해서 유명해진 그 선배.


"어, 정국이랑 태형이네. 너희 여기서 뭐 해?"
"요새 화이트보드에 장난치는 놈 잡겠다고 얘가 절 끌고 여기에 왔어요. 그러는 선배는요?"
"난 학생회잖아. 그러니까 너희보다 늦게 집에 가지. 지금 가려고.... 근데 화이트보드? 저 밑에 있는 거? 요새 유명하던데, 누가 태형이 이름만 줄창 쓴다고."
"그렇죠. 그거 때문에 얘는 잡으러 왔는데.... 보시다시피 이렇게 처자고 있고."
"귀엽네, 범인 잡으려고 그러는 거라니."
"근데 그거 절대 못 잡을걸요."
"응? 왜?"
"글쎄요. 아무튼 태형이가 잡으려고 하는 거엔 절대 안 잡힐 거예요."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는 석진이 일단 집에 가겠다며 계단을 내려간다. 그 뒷모습을 보다가 슬쩍 곁을 보니 태형이 곱게 자고 있다. 얘는 참 무인도에 혼자 갖다놔도 절대 죽지는 않을 거야. 어디에 갖다놔도 잘 먹고 잘 자고. 신기해. 그래도 딱히 어깨를 빼낼 생각은 없어서 가만히 보다가 슬슬 다가간다. 정국이 몸을 움직이면서 태형이 뒤로 쏠려서 계단에 머리를 찧으려는 걸 겨우 잡았는데도 눈을 뜰 생각은 없는 듯 고롱고롱 잘만 자는 모습에 한숨을 푹 내쉬다 입술을 맞대었다.


진득한 키스는 아니지만, 아주 가볍게 닿았다가 떨어진 입술은 잠시 맞물렸을 때 따뜻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태형이 입술을 오물거렸다. 진짜 바보 멍청이. 태형은 전정국 덕분에 아직 여자 친구도 사귀어본 적 없고 첫 키스도 못 했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다르다. 아주 오래전부터 이렇게 도둑 키스로 했으니까. 친구라는 이름으로 곁에 있으면서, 늘 이렇게 몰래.... 했으니까.


그 한 번조차 제대로 모르는 김태형은 진짜 바보다. 왜냐하면,


정말 태형의 근처에 있거든. 그 칠판맨은.


[국뷔] 흔한 18세 남고딩의 로맨스 데이 02 방탄소년단 팬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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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뷔] 흔한 18세 남고딩의 로맨스 데이 02
W. 국빛


"그 새끼, 존나 지능적이야!"


콧김을 가열차게 내뿜으면서 교실에 들어오자마자 한 말이 저것. 덕분에 책을 쌓아 베개 삼고 자던 정국이 부스스하게 일어나 저건 또 무슨 미친놈인가 하는 얼굴로 바라본다. 아침에 등교할 때부터 저 상태였나보다. 제법 약이 올랐는지 웬만하면 얼굴이 잘 빨개지는 애가 아닌데 하얗게 나올 것 같은 콧김에, 벌게진 얼굴까지. 고질라가 따로 없네. 뺨만 예쁘게 붉어진 게 아니라 온 얼굴이 붉어졌길래 정국의 앞자리에서 스르륵 일어난 지민이 태형에게 가서 깐족거린다. 그 토마토 같은 얼굴을 보고 턱을 딱 잡더니 이리저리 돌려보다 잘못 들으면 염불처럼 들리는 노래를 불러댄다.


"불타오르네. 파이어!"
"뭐래, 이 새끼는. 어디 아프냐?"
"그러는 넌 유행을 모르냐? 이거 요새 한창 잘 나오는 노래야. 길만 지나가면 다 나오는."
"됐어, 인마! 안 그래도 열 받아 죽겠는데!"


씩씩거리면서 자리로 돌아가는 태형을 보며 다들 연민의 눈을 보낸다. 오늘 아침에도 그 문제의 칠판맨이 떴거든. 어느샌가 그 화이트보드는 학교의 명물이 되었고, 아이들 사이에서는 '칠판맨'이라는 없어 보이는 이름으로 존재가 유명해졌다는 게 함정이었다. 누구든 그 칠판에 대해 아는 사람이라면 선생과 제자를 불문하고 오늘은 또 어떤 또라이 같은 답을 써 두었을까 등교하면서, 출근하면서 한 번씩은 둘러보고 가는 게 일상이 되었을 정도니까. 선생님 같은 경우는 학생들 앞에서 대놓고 그 답을 기다릴 수는 없어 근처에 학생이 지나가면 괜히 '이거 어떤 놈이 썼어?!' 라고 화내는 척하면서도 슬쩍 그 답을 보고 답을 지우는 척, 교무실에서는 저들끼리 수군거리기 바쁘다는 걸 학생이 모를 리는 없었다. 처음에는 노발대발하던 학생 주임조차도 가장 먼저 출근해서 그걸 보고 안 본 척하기 바쁠 정도였으니까. 오늘 질문이 뭐였냐? 몇 살 즈음부터 이성에 관심이 있었습니까 아니었음? 답은 뭐였지,


'졸라 어릴 때부터 김태형에게 관심있었음'

질문과 답을 기억해낸 학생들이 태형이 지나갈 때마다 안타깝다는 시선을 보내오니 태형이 저러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화장실을 가든, 급식실을 가든, 복도를 지나가도 이미 유명인사가 되어버린 탓에 태형의 분노는 날로 커졌지만 도통 그 문제의 칠판맨은 잡힐 생각도 하지 않고 단서 하나 못 잡고 있으니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오르기 직전이다. 그래도 반에서 파급력이 좀 있던 놈인지라 태형이 반 아이들에게 '늬들 그 얘기 내 앞에서 더하면 뒈져!' 하고 빽 소리치자 다들 다른 곳을 보는 척, 눈을 돌리고 그때야 자리로 온 걸 보며 정국이 느리게 몸을 일으켰다. 입가 옆으로 떨어진 침을 대충 닦고 하품 겸 기지개를 켜던 나른한 모습에 태형이 구시렁거렸다.

"넌 왜 아침부터 이러고 있냐."
"진짜 그 새끼 보통 또라이가 아니야...."
"누구? 칠판맨?"
"응."
"걔 잡는다고 어제는 잠복근무도 했잖아. 세상에 인문계도 아니고 야자도 없는 실업계인데 아홉 시까지 학교에 있는 놈 너밖에 없었을 거다,"
"너도 같이 있었잖아."
"덕분에 나는 피곤해 죽을 것 같고."
"무슨 새 나라의 어린이냐? 그것도 경비 아저씨 안 돌았으면 안 가고 지킬 수 있었는데!"
"그러니까 어느 미친놈이 너처럼 그러고 있겠냐고, 그냥 무시하면 될걸."
"무시할 수 있겠냐고! 화장실 가서 볼일을 봐도 다른 것들이 와서 그러는데! 전엔 얼굴도 모르던 놈이 와서 뭐라는 줄 알아? 네 벗은 몸 상상하는 놈 있으니 조심하래! 대걸레로 밀어버릴까 하다 참았어."


그 말을 듣고 정국의 표정이 짐짓 심각해진다. 얘라면 그러고도 남으니까. 사실 정국과 태형은 딱 고등학교에 와서 친구가 되었다거나 하는 케이스가 아니라 아주 어릴 때부터 친구였으므로 태형의 여러 가지 모습을 다 본 것도 정국이다. 그중에서는 가끔 머리끝까지 화가 난 김태형이 주변에 있던 걸 잡고 휘둘러가며 사람을 곤죽으로 만든다거나 하는 망나니 같은 모습도 있기는 했다. 특히 대걸레처럼 길고 흉기가 될 수 있는 걸 잡으면 더 괴팍해진다는 것도 다 알고 있어서 그런 말을 한 게 어떤 놈인지 몰라도 정말 저 세상갈 뻔했다는 것만은 틀림없다. 애꿎은 희생자가 나올 뻔했군.

"넌 아니지?"
"또 뭘."
"오늘 답을 보니까 졸라 어릴 때부터 나한테 관심이 있었대. 근데 넌 나랑 유치원부터 같이 나왔잖아."
"나 어제도 너랑 같이 있었거든?"
"그렇지. 네가 그런 미친 짓을 할 리 없지. 음. 근데 그 새끼 진짜 언제 오는 걸까. 세상에 내가 새벽 다섯 시에 와서 지키고 있어도, 어제처럼 밤늦게까지 남아있어도, 꿀 같은 단잠을 포기하고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에 나가도 그 답이 항상 쓰여 있단 말이야. 수업 시간 빼고 다 나가는 것 같은데 모습이 잡히질 않아. 중앙에 CCTV도 있지 않냐?"
"그거 고장 난 지 오래야. 알만한 사람은 다 알아. 그냥 모르는 사람이나 방범용으로 달았나 보다 하지."
"이러다 스트레스받아서 죽겠다...."


울상을 짓는다. 그게 제법 귀엽기도 해 머리를 몇 번 쓰다듬자 차가운 책상 위로 얼굴을 대고 눈을 감는 걸 보고 얘는 또 점심시간까지 자려나 보다 싶어 그냥 두기로 한다. 그래놓고 정국 또한 책을 다시 곱게 쌓아서 태형을 보고 엎드리는 게 아니라 그 반대쪽으로 얼굴을 휙 돌려서 엎드리는데 왜인지 정국의 입가에 미소가 떠오른다. 평생 찾아도 김태형이 찾으면 못 찾을걸.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거라고.


***


"태형아. 야."
"왜애.... 점심 시간이야?"
"뭐래. 선생님이 너 일어나래."


아이 씨.... 또 유명인 드립치면서 자지 말라고 잡는 과목인가. 부스스한 머리를 대충 누르면서 몸을 일으킨다. 아직 반도 채 뜨지 못한 눈을 보면서 앞에 있던 선생은 쯧쯧, 혀를 끌끌 차고서 뒤로 나가 서 있으라 한다. 옆을 보자 정국은 언제 그랬냐는 듯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이 수업이 좋아 죽겠다는 듯 찬양하는 눈빛으로 칠판을 보고 있다. 으아니, 이 눈빛이 아름다운 새끼가? 그 모습에 어이가 없어 조용히 입을 연다.


"존경하는 선생님. 정국이도 잤는데 왜 저 자식은 잡지 않으십니까?"
"정국이? 쟤는 자는 거 못 봤어. 빨리 나가."

우 씨, 진짜 나만 미워해. 터덜터덜 뒤로 나가 서 있는데 정국이 피식 웃는다. 태형의 물귀신 작전 따위 통하지 않는다는 듯 비웃는 모습에 태형의 얼굴이 또 붉으락푸르락, 그러다 금세 식어서 인자하게 웃는다. 그 웃음에 이번에는 반대로 정국이 웃는 얼굴을 거두고 얼른 앞을 보려고 했는데 앞에는 들리지 않을 작은 목소리로 부른다. 어차피 창가에, 맨 뒷자리였으니까. 정국아, 정국아. 그 부름에 뒤를 힐끔 보고 있는데 태형이 앞 눈치를 본다. 칠판에 필기하는 선생님을 보고 씩 웃더니 우스꽝스러운 몸짓으로 어설프게 춤을 춘다. 흡사 탈춤과도 비슷한 그런 것. 그러다 선생님이 학생들 쪽을 보면서 설명할 땐 가만히 점잖게 서고, 또 칠판을 보면 춤을 추고.

태형이 그러고 있음을 눈치챈 정국과 몇 명의 학생은 뒤를 보면서 낄낄대고 있고 지민은 태형을 측은하게 바라보면서 저놈이 요새 칠판맨에게 시달리다가 결국 미쳤구나.... 생각한다. 그러는 와중에도 점차 태형의 몸짓이 절정을 향해 달리고 반 아이들의 참지 못한 웃음소리가 점점 커질 때 선생님이 딱 돌아본다.


자세를 정돈하지 못하고 팔은 공중에, 다리는 흐물거리고 표정은 우스운 그 상태로 굳어버려 선생님과 눈이 마주친다. 잠시 손에 들고 있던 분필을 저 이마를 향해 던질까 하다 아까의 태형처럼 인자하게 웃으시면서 딱 한마디 하신다.

"나가."

손끝이 바깥을 가리키고 태형이 한층 더 힘이 빠져 히잉, 하는 우는 소리와 함께 밖으로 나간다. 결국 쫓겨나는 뒷모습에 정국이 귀엽다는 듯 입을 가리고 쿡쿡 웃자 지민이 그걸 힐끔 보고 고개를 내젓는다. 얘도 참 다채로운 또라이구나.

***


결국 쫓겨난 태형이 입술을 삐쭉인다. 전정국도 잤는데. 특히 그 맑은 맹세, 어색한 얼굴만 봐도 알 수 있는데. 잠 안 잤다고 맑은 맹세를 하겠다는 거야 뭐야. 투덜투덜. 구시렁거리고 있자 저 복도 끝에서 어디서 많이 본 사람이 점점 다가온다. 이 학교에서 또라이라고 소문 난 사람 중 다른 한 명, 윤기였다. 3학년이었던 그가 이 복도로 올 일은 잘 없는데. 그래도 태형이 있는 교실이 중앙 계단과 조금 가깝기는 하지만. 어쨌든 윤기도 태형을 알아보고 일부러 다가오는 모양이었다. 손에는 이상하게 생긴 도구를 들고. 아마 수업할 때 쓸 교구 같은 모양이었다.


"넌 왜 이 시간에 복도에 나와있냐."
"쫓겨나서요. 안녕하세요."
"새삼스레 웬 인사야. 또 이상한 짓 했지?"
"형보다는 안 이상한 것 같은데...."
"내 손에 들고 있는 이거 안 보이냐? 머리 한 번 대차게 때려줘?"
"잘못했습니다."
"이따 점심에 같이 밥이나 먹자. 석진이는 학생부라 바쁘다 하고, 남준이는 밥 생각이 없대."
"호석이 형은요?"
"걔 오늘 대회 나갔잖아. 댄스부 애들 일본으로 날랐다고 하더만."
"와, 일본.... 나 유명한 사람이랑 알고 있는 건가?"
"그런 듯. 국제 대회니까. 아무튼 나 오늘 왕따라고."
"알았...."


드르륵, 교실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둘 다 한꺼번에 시선을 한곳으로 돌리니 전정국이 뒷문에서 나온다. 그 모습에 윤기가 넌 왜 나오냐 물었더니 자기도 쫓겨났단다. 다시 자려고 했더니 박지민이 전정국 잔다며 일렀다고. 그 말에 신나게 웃어 재끼던 태형의 옆구리를 한 번 쿡 찌르고 나란히 옆에 선다. 그러다 윤기가 뭘 보고 태형에게 가깝게 다가와 머리칼에 뭐가 묻었다며 하나씩 떼어주려고 손을 뻗자 그 손을 정국이 잡아 가만히 내려 주었다. 어.... 지금 뭔가, 정국이 표정이 굳은 것 같기도 하고? 힐끔거리면서 보고 있는데 좀처럼 볼 수 없는 얼굴이다. 마치 태형을 만지지 말라는 듯 공손하고 부드러우면서도 은근히 날카롭다는 걸 윤기는 몰랐지만 태형만큼은 알 수 있다. 이거 은근히 나한테 닿는 손 내친 거다.

"그런 거 만지면 선배 손까지 지저분해져요."
"내가 무슨 오물 덩어리냐! 포켓몬스터에 나오는 질뻐기냐!!"
"시끄러워. 쫓겨나서도 혼나고 싶냐. 그리고 윤기 선배, 선생님이 당장 안 가면 나와서 혼내실 거라고 했는데. 김태형이랑 떠들지 말래요."
"아, 맞다. 나 지금 수업 중이었지. 씨발. 얼른 안 갖다 주면 또 존나 뭐라고 할 텐데. 나 간다. 이따 봐."

네에. 제 2의 윤기처럼 무기력하게 대답하자 윤기가 얼른 복도 끝 계단 위로 사라졌다. 그래도 여전히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정국이 묻는다. 뭘 이따 봐? 어, 밥 같이 먹자던데. 그런 이유로 너 오늘은 지민이랑 먹어라. 그랬더니 또 정국이 인상을 잔뜩 찡그린다. 저 선배는 같은 학년에 친구가 없다니? 왜 너한테 그래. 밥 좀 같이 먹을 수 있지 뭘 그런 걸 가지고 그러냐.... 별것도 아닌 일로 예민하게 군다는 듯 태형이 조금 인상을 찡그리자 정국의 인상이 더 험악해진다. 태형이 그걸 보고 픽 웃으면서 정국의 뺨을 어루만지다 곧 양 볼을 잡고 쭉 늘렸다.

"아퍼."
"우쭈쭈, 우리 정국이 친구 뺏겨서 기분 나빴어요?"
"그런 거 아니니까 좀 놓지?"
"안 그래도 칠판맨때문에 난 지금 무지 심란한데."
"나 때문에 더 심란해?"
"아니, 그나마 기분이 좀 풀리는 것 같아."

그 말에 정국이 그제야 웃는다.

***

그리고 시간이 조금 더 지나 점심시간. 윤기와 함께 식판을 나란히 들고 마주 보고 앉으니 좀 떨어진 곳에서 배식을 받고 있던 정국과 눈이 마주쳤다. 맛있게 먹으라는 듯 먹던 숟가락을 휙휙 휘두르면서 아는 척을 하자 정국이 또 인상을 쓴다. 쟤 오늘 왜 저러지. 나만 보면 인상을 팍팍 쓰네. 태형이 조금 무안해져서 수저를 입에 물고 시무룩해지고 있는데 태형의 옆으로 식판이 자리를 잡는다. 그리고 곁에 앉는 건 정국. 윤기 옆에 자리를 잡고 어색하게 인사를 하는 건 지민이었다.

"늬들도 왔네."
"네. 같이 먹어요, 선배."
"그러든지. 나야 좋지."

그러고서 아무 말도 없이 밥만 퍼먹어서 지민이나 태형이나 이 자리가 가시방석이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정국이 윤기를 뚫어져라 보면서 먹는 것도 있고. 눈에서 불꽃이 튀는 것 같은데 윤기는 그러거나 말거나 꿋꿋하게 밥을 먹는다. 그 초인적인 능력에 놀라면서 평소라면 복스럽게 잘 먹을 태형이 정국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면서 왜 그러냐고 눈치를 준다. 그러나 정국은 꿈쩍도 하지 않고 윤기가 몹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바라보면서 부지런히 씹는다. 태형이 계속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정국을 힐끔거리고 있자 윤기가 정국의 시선을 깔끔하게 무시하고 반찬으로 나온 돈가스인지 그냥 튀김옷 입은 건지 정체를 알 수 없지만 일단 나오면 맛있다고 먹는 걸 집어 태형의 식판에 올려주었다.


"어디 아파? 왜 이렇게 못 먹어?"
"어, 안 아파요."
"너 그런 거 잘 먹잖아. 먹어."

챙겨주는 모습에 태형은 괜히 옆이 뜨겁다. 조금 전까지는 눈빛 레이저만 쏘던 애가 이젠 아예 타오르는 것 같아서. 아까 아침에 지민이 불렀던 노래가 생각난다. 불타오르네, 파이어! 윤기는 거기서 한 두어 숟갈 더 먹고 정리한 뒤 일어났다.

"맛있게 먹고 올라가라. 정국이 시선이 영 부담스럽네."
"먹을 건 다 먹어놓고...."
"시끄럽고, 너도 다 먹었으면 가지?"
"예...."


윤기 옆에 있던 지민까지 제대로 다 못 먹고 덩달아 식판을 들고 일어난다. 그것도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 같은 표정으로. 아, 오늘 점심은 먹으면 다 체하겠네.... 그러자 정국이 지민의 식판 앞쪽을 꾹 누른다. '넌 아직 다 먹지도 못했잖아. 더 먹어.' 라고 해서 도로 앉혀놓고 정국이 일어난다. 그 후로 윤기에게 제안했다.


"선배, 우리 농구나 한판 하죠."
"어, 그럴까? 먹었으니 운동이나 하지, 뭐."


갑자기 웬 농구? 밥 먹고 금방 뛰면 명치 아프지 않나? 참 쓸데없이 체력 낭비하는구만. 맛있게 먹고 남은 시간 잘 때 써야지. 그런 게 보람찬 거지. (사실 이것도 별로 보람찬 일이 아님.) 저런 손실을. 그래놓고 나란히 사라지는 둘을 보면서 태형이 그제야 파하, 하고 숨을 크게 내쉬었다. 싸움이라도 붙는 줄 알았네. 그렇게 안심하고 있는데 지민의 표정이 어둡다.

"왜 그러냐."
"좀 전의 그게 윤기 선배한테 싸움 건 거야, 미친놈아...."
"그래? 그냥 농구하자는 거잖아."
"그러니까 그게 그거라고. 쟤 아까도 이상하더니."
"아까?"
"응. 야, 솔직히 난 윤기 선배랑 별로 안 친해서 좀 불편해. 근데 괜히 여기 와서 앉았겠냐? 아까 밥 타고 있는데 쟤가 너 보면서 그러잖아. 안 되겠네.... 이러고 구시렁거리더니 무작정 여기 앉은 거야. 덕분에 나까지 딸려와서."
"그래...?"


지민의 말을 듣고 태형이 푸흐흐, 웃는다. 유난히 어릴 때부터 태형이 남이랑 노는 것도 싫어하고 누가 만지는 것도 싫어하고 오래 쳐다보고 있으면 싫어하던 게 정국임을 아니까. 동네에 살던 다른 여자애랑 소꿉놀이라도 하려고 하면 와서 깽판을 치고 여자애를 쫓아낸 다음 자기가 아빠, 태형더러 엄마 하라고 고집을 피우던 모습이 떠올라서 쿡쿡 웃자 지민이 반찬을 우물우물 씹으면서 생각했다.

진짜 내 주변엔 왜 이렇게 또라이들이 많은 거냐. 근데 아까 그것도 말해야 하나? 수업 시간에 정국이 괜히 밖으로 나간 게 아니라고. 창밖으로 태형이 윤기와 떠들고 있는 걸 보고서 갑자기 휙 엎드리더니 지민의 등을 찔러가며 속삭였다고. 얘네 진짜 이상해.


'야, 너 빨리 선생한테 나 잔다고 일러. 밖으로 나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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